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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파게티가 다크 초콜릿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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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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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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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Emilija Manevska / Getty Images
초콜릿 좋아하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은 화이트 초콜릿입니다.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한단 이야기죠. 가끔 급속 당충전이 필요할 때 설탕 듬뿍 들어간 밀크 초콜릿을 먹기도 하지만, 살려고 먹는 거지 좋아해서 먹는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콜릿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편입니다. 특히 카카오 함량이 높은 다크 초콜릿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고요.
작년 로스터리 커핑을 리뷰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커핑 세션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다루진 않았지만 사실 로스터리 팀에게 인상적일 수 밖에 없었을 커핑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나인티플러스 커핑이었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 작년에 샘플로스팅룸을 가득채운 커피가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강렬한 홍삼향을 뽐내던 르완다 커피, 다른 하나는 저로선 짜파게티 외에 다른 노트를 생각할 수 없었던 나인티플러스의 루비(Ruby)였습니다.
저는 그때 왜 짜장면이 아니라 짜파게티가 떠올랐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짜파게티 소스를 검색해보니 양파와 카라멜이 들어가더군요. 춘장에 카라멜라이즈된 양파가 섞였을 냄새를 상상하니 얼추 짜파게티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곤 무슨 이런 커피가 다 있지, 생각하며 나인티플러스 커피의 포장지를 들여다 보았죠. 그 나인티플러스 사람들은 짜파게티를 안 먹어봤을텐데, 이 커피에 어떤 테이스팅 노트를 부여했을지 궁금했거든요.
원두봉투에 써 있던 노트는 '다크 초콜릿'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건 사기야'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비록 초콜릿을 잘 안 먹긴 하지만 그래도 무슨 맛인지는 아는 사람인데, 이게 어딜 봐서 다크 초콜릿일까 싶었습니다. 뒤에 적힌 제비꽃, 머스크, 자몽캔디와 같은 노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인상적인 커피인 건 인정하지만, 다크 초콜릿이란 노트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고요.
그게 어느덧 작년 8월이었네요.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오늘, 저는 3월에 출시할 콜롬비아 다닐로 페레스 커피를 하루종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습니다. 200시간 가까이 발효를 진행한 내추럴 커피로, 제법 과일스러운 향을 갖고 있지만 저에게는 짜파게티로 다가왔던 커피였죠.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커피가 더 차가워져 있었습니다. 다시 홀짝홀짝. 그때 머리를 번뜩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믿기가 힘들었지만 그건 다크 초콜릿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왜, 다크 초콜릿을 먹으면 열심히 삼킨 후에도 아직 일부가 입안에서 남아 끈적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미각이 짐을 덜어서인지 저는 그 시점에 초콜릿의 향을 가장 잘 맡게 되는 것 같은데, 바로 그 향이 이 커피에서 나는 것 같았습니다.
커핑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자신을 의심해봐야 하겠죠. 그것은 어쩌면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어제 바로 그 자리에서 콜롬비아 초콜릿을 먹었거든요. 꽤 다크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어서 어제의 기억이 무의식중에 떠올라 오늘의 저에게 착각을 일으킨 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제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크 초콜릿을 먹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요? 진상이 무엇이었는지 알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달라졌거나 커피가 달라졌거나 일텐데요. 실제로 커피의 온도가 내려가긴 했으니까 후자의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짜파게티와 다크 초콜릿의 차이는 향의 세기가 아닐까 하고 혼자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온도가 많이 내려간 후엔 아무래도 향미 물질이 덜 증발될테고, 저는 그 약해진 세기를 다크 초콜릿으로 느낀 게 아닐까 싶은 건데요. 아직은 미지의 영역입니다만, 언젠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된장, 다크 초콜릿, 라스 라하스 농장의 페를라 네그라 같은 커피가 왜 비슷한 뉘앙스의 향을 느끼게 하는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요.
이 글은 제가 다크 초콜릿 노트를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이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올해 옥션시리즈의 예고편이기도 합니다. 저처럼 진득하게 발효된 커피를 만나면 짜파게티나 각종 장들을 머리에서 떨쳐내기 힘드신 분들 계신가요? 곧 이 분야의 끝판왕을 만나게 되실 거란 사실을 알립니다. 또한 올해 상반기에 독특한 향미를 지닌 콜롬비아 커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데요. 작년 하반기의 BB가 에티오피아 맛집이었다면, 올해 상반기의 BB는 좀 다른 스타일로 평가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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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Derek, 수석연구원
"아침에는 플랫화이트를, 낮에는 드립 커피를 마십니다. 저녁에는 못 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