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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과일이라는 테이스팅 노트

작성자
발행일
2021/05/11
Tags
커핑
커피에세이
뉴스레터
컨트리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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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많은 분들이 일일보고서에 올려주시는 엘 파라이소 디카페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두 달 전 로스터리에서 런칭 준비를 하면서 이 커피가 어떤 식으로든 화제가 되길 바랬어요. 마냥 긍정적인 이야기만 나오진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생각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어주길 기대했고요.
사실 여러분의 일일보고서를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 커피를 통해 어떤 노트를 느끼셨을까 였습니다. 안전한 '열대과일' 노트를 거부하고, 용감하게 리치와 구아바를 내세운 이 커피의 테이스팅 노트가 얼마나 우리 팀에 공감이 되었는지 궁금했거든요. 혹은 다른 노트를 느끼셨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싶기도 했고요.
여러 메일을 읽으며 제 눈에 가장 많이 띈 노트는 역시 '열대과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로스터리 커핑 테이블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좋은 케냐 커피를 수식하기 위해 많이 사용하는 노트죠. 그런데 저는 히비스커스나 체리와 같은 개별 노트와는 다르게, 열대과일이란 노트를 들으면 상대방이 정확히 어떤 걸 느낀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열대 기후에 자란 과일들이 가진 공통점이란 게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그걸 하나로 묶어서 표현할 만큼 열대과일들은 서로 비슷한 걸까요?
그래서 대표적인 열대과일들을 아래에 나열해보았습니다. 과일 목록을 쭈욱 읽어보시고,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파인애플 (Ananas comosus)
두리안 (Durio zibethinus)
바나나 (Musa ssp.)
망고 (Mangifera indica)
파파야 (Carica papaya)
망고스틴 (Garcinia mangostana)
람부탄 (Nephelium lappaceum)
리치 (Litchi chinensis)
구아바 (Psidium guajava)
용안 (Dimocarpus longan)
카람볼라(스타후르츠)(Averrhoa carambola)
야자:코코넛 (Cocos nucifera)
패션후르츠(백향과)(Passiflora edulis)
석류 (Punica granatum)
피타야(용과)(Hylocereus undatusHylocereus polyrhizusHylocereus costaricensis,Selenicereus megalanthus)
아보카도 (Persea americana)
로즈 애플 (Rose Apple)
포멜로 (pomelo)
아세롤라(acerola)
그라비올라(graviola)
잭프루트 (Artocarpus heterophyllus)
대추야자 (Phoenix dactylifera)
<출처 : 위키백과>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셨나요? 저는 대체로 부드럽고 끈적끈적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대과일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향이 있지 않냐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잘 모르겠어요. 파인애플과 바나나, 망고와 패션 후르츠는 제법 다른 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 모든 과일을 믹서에 넣고 갈아서 만든 주스의 향이 우리가 말하는 '열대과일'인 걸까요? 물론 그런 건 아니겠지요.
여기까지 읽으시고 '그럼 열대과일이란 노트를 쓰지 말란 얘기냐'고 볼멘소리를 내실 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그런 건 아닙니다. 열대과일인 것 같긴 한데 향의 선명도가 낮아서 특정 과일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고, 여러 열대과일의 향이 섞여 있어서 복합적인 열대과일로 느낄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커피가 선명한 향을 가질 수도 없고, 꼭 그래야만 좋은 커피인 것은 아니겠죠.
다만 저 스스로 노트 표현에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대과일이란 노트를 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자-와 같은 마음이랄까요. 제가 말레이시아에 살 때는 쉽게 열대과일을 구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두리안 철이 되면 룸메이트들이 냉장고에 채워놓은 두리안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곤 했어요. 동남아 나라들 다니기가 편해서, 태국에 가면 파파야 샐러드를 먹고, 베트남에선 구아바 주스를 마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열대과일이란 광범위한 노트를 사용하기가 망설여지나봐요.
열대과일에 대해선 이렇게 따지고 드는 저지만, 사실 매달 가이드 커핑이 끝나고 테이스팅 노트를 정할 때면 왠지 견과나 꽃, 허브 같은 큰 카테고리 안에 숨고 싶어집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안전한 노트를 커피에 주고 싶은 마음과 모두가 느끼진 못하더라도 우리 팀이 존재한다고 믿는 매력적인 노트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해요. 매달 나오는 원두카드 앞면에 적힌 테이스팅 노트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찾은 균형점인데, 어떤 선택을 하든 마음 한 켠에는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그래서 엘 파라이소 디카페인의 테이스팅 노트를 정할 때 그렇게 신이 났었던 것 같아요. 다소 용감한 리치와 구아바 노트를 준 것은 물론 커피가 갖고 있는 선명한 향 덕분이었지만, 언젠가 파라가 저에게 해준 한 마디 -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요즘 우리 테이스팅 노트 너무 얌전해 빈브라더스 약해졌네' - 가 제 가슴에 따끔하게 박혔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소수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노트를 용감하게 쓰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만약 우리 팀이 커피에 존재한다고 믿고, 아직 잘 모르는 사람도 그 커피를 통해 새로 배울 수 있는 향이라면 그 노트 한번 용기내서 써 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테이스팅 노트를 정하는 사람들부터 플레이버 휠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야겠죠.
당장 다음주부터 패트릭이 로스터리에 대여해주신 르네뒤카페 아로마 키트를 꺼내서 트레이닝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식품들을 활용한 캐주얼한 세션들도 해보고, 언젠가 있을 포의 테이스팅 세미나도 꼭 참여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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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Derek,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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